<Bringing Out the Dead> 직업을 잘못 선택한 자의 비극

이기상 평론가

죽은자들을 꺼낸다니, 무슨 말인가? 구급대원에 대한 이야기라면 죽은자들을 살린다는 제목이 더 어울릴텐데. 폴 슈레이더가 각본을 쓰고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을 맡은 <Bringing out the Dead>는 죽기 일보 직전의 남자가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다. 섬뜩하고 황폐한 밤거리를 누비며 생사의 기로에 놓인 인간들을 구하려는 주인공은 일련의 악몽같은 일들을 겪게 되고, 곧 자신이 하는일이 정말로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지경에 이른다. 그는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것인가, 차라리 죽는편이 나을 자들을 억지로 꺼내는 것인가? 

영화는 맨해튼의 야간근무 구급대원 프랭크의 삼일밤동안의 겪는 일을 그린다. 여느 때처럼 밤거리를 쏘다니며 위급한 사람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던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진 노인을 돕게 되고, 그곳에서 노인의 딸 마리를 만나게 된다. 삼일 밤에 걸쳐 프랭크가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할때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마리와 마주치게 된다.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과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으로 결국 마리는 마약중독자였던 과거 습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프랭크는 마리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있는 일명 ‘오아시스’라는 마약상의 집을 찾아가서 그녀를 구한다. 그 과정에서 그 또한 트라우마와 수면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터라 마약상의 유혹에 감회되어 마약을 하게되고, 환각체험 이후 기적적인 각성을 통해 마리를 데리고 그곳에서 나온다. 이후에도 각각 프랭크와 마리의 상황을 나아지지 않고, 프랭크는 마리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낸다. 프랭크는 노엘을 구함으로써 과거에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어느 환자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마리의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마리의 고통에 구원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화 초반 마리의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프랭크는 마리에게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게 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이 흐르고 아버지는 맥박을 되찾는다. 주인공의 이름이 프랭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죽어가는 자들을 되살리는 시나트라의 음악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풍기는 도덕적 모호성과 같이 프랭크를 구원의 천사같은 일차원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의 내면에는 보다 높은 영적 차원에 도달하려는 고결함 (‘내 어머니는 항상 내가 신부같이 생겼다고 하셨어’)과 끈적이는 죽음 충동  (‘무엇보다 나는 그들처럼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사라지고 싶었던 것이다.’) 등의 복잡한 욕구들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프랭크는 아이러니의 인간이다. 그의 책장에는 시집들이 꽂혀있고 그의 내래이션은 그가 자신의 직업을 단순한 구급대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적인,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직업을 잘못 선택해도 한참 잘못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직업이 ‘사람을 살리기 보다는 비극의 목격자가 되는 일’임을 깨달은 순간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자신은 ‘슬픔 받이’일 뿐이라는 존재론적 공허에 사묻히게 된 것이다. 그의 직업적 (존재론적) 오류는 그와 함께 일하는 구급대원 파트너들과의 대조를 통해 블랙유머식으로 강조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프랭크는 각각 세명의 파트너들과 일하게 되는데, 그들은 구급대원 일에 천성적으로 맞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각각 무심하거나, 잔혹함을 즐기거나, 자신의 일에서 상당한 재미와 만족감을 느낀다. 자기 자리에 꼭 맞아 떨어지는 인간들 사이에서 프랭크는 모난 도형같이 어디에도 맞지 않고 자꾸만 튕겨 나가지는 인물인 셈이다. 프랭크는 구급대원으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밤은 그의 낮이고 거리의 ‘당연한’ 부패는 그에게 공포스런 질병이다. 

프랭크는 성직자의 섬세한 영혼으로 가장 거친 직업에 종사하고, 구급대원으로서 죽음을 갈망하는 직업적 역발상에 사로잡혀 있으며, 살인자이자 구원자인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살아있는 모순’이다.*

슈레이더식의 아이러니한 인물의 전형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트래비스 비클일 것이다. 트래비스는 손님과 계속 접촉하는 직업인 택시드라이버이지만 고립과 단절에 시달리고 프랭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직업인 구급대원임에도 자살충동과 살인욕구에 시달린다. <Taxi Driver>는 1976년작이고 <Bringing Out the Dead>는 1999년에 개봉했다. 23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슈레이더와 스콜세지는 똑같은 인물을 다루기 위해 영화를 찍은 것인가? 트래비스와 프랭크, 두 모순적 인간 사이에는 한 가지 핵심적인 차이점이 있다. 바로 행위의 의도와 결과 사이의 간극이다. 트래비스는 전쟁 트라우마와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실존주의적 위기에 봉착한 인물이다. 그는 존재론적 공허를 어떻게든 메우기 위해 정치인을 살해할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준비한다. 그러나 암살시도가 실패하자 그의 총구는 포주에게로 향한다. 그는 포주를 살해하고 그의 미성년자 연인을 구해내고 언론은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트래비스의 영웅적 행위는 우연에 가깝다. 그는 단지 내면의 공허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고 그것은 누구든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ringing Out the Dead>의 프랭크는 과거에 살리지 못했던 환자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수면부족과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내면 때문에 트래비스에 못지 않는 정신분열적 상태에 시달린다. 그는 존재론적 공허보다는 수면 (혹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히고 때문에 꼭 누군가를 살려내야 한다는 맹목적인 직업의 요구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혹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 도덕적인 행위가 아닐까? 따라서 프랭크는 죽어가는 부랑자 노엘을 살려내는 한편 마리의 아버지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낸다. 비록 그가 제정신이 아닐지라도, 혹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도덕적 질문이자 가치의 재창조인 셈이다. 트래비스가 자신의 의도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허우적거리는 희극적인 인물이라면 프랭크는 나름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한 무게를 지고 가야하는 비극적 영웅인 것이다. 

*Taxi Driver (1976)에서 짝사랑 베시가 트래비스를 부르는 표현으로, 영어로는 ‘walking contra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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