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acher’s Lounge> 어른들의 시험 기간

이기상 평론가

나에게 죄를 저지른 자의 자식이 나의 가여운 학생이다. 한 개인으로서, 동료로서, 선생으로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카를라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이상주의적인 선생이다. 그녀가 새로 이전한 학교에서 도난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고, 그녀가 가르치는 이민자 학생이 용의자로 몰려 문제가 생기고, 그 와중에 교무실에서 동료 교사의 부정행위를 목격하게 되면서 일은 점점 꼬여간다. 


프로이트는 공포란 익숙한 것이 낯설어질 때라고 정의 내렸다. <티처스 라운지>는 대낮의 햇살 가득한 학교라는 공간을 서슬 퍼런 생태계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공포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 속 학교는 또한 일종의 기시감을 자아내는데, 바로 사회 자체를 응축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성적 순위표를 공개할 것인가 라는 화두에 대해 반 아이들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우리는 감독의 뜻을 읽는다. 교실이라는 공간은 사회의 민주주의적 절차와 파벌 갈등의 축소판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교라는 배경은 그 안의 바글거리는 인간 군상을 관찰하기 위한 무대일 뿐이다. 영화는 사회라는 거대한 주제를 거시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주인공 카를라의 시점을 통해 매우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시스템의 스케치를 더듬어간다. 얕은 심도, 폐쇄 공포적인 1.37:1 화면비, 집요하게 인물을 따라가는 핸드헬드는 일찍이 관객을 카를라의 주관적 시점에 고정시킨다. 학교 건물의 전경 쇼트는 일체 배제되어 있고, 광각렌즈를 사용한 쇼트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시종일관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공간을 꽉 조인채, 격한 날숨을 모방한 사운드트랙과 조화를 이루며 ‘숨가쁨의 미학’을 극한까지 추구한다. 관객의 경험은 카를라의 시점과 동일시되고,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도덕적 시험기간’에 능동적인 수험생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질적인 배경이 학교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지, 사실상 영화는 법정 영화이기도 하고 언론 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오스카와 그의 엄마의 딜레마에 정착하기까지 카를라는 수많은 크고 작은 ‘재판’들을 경험한다. 반의 이민자 학생이 도둑으로 몰리고, 불량 학생들이 수업을 빠져나가 담배를 피우며, 한 아이는 시험 중 부정행위를 저지른다. 사건사고는 쉴 새 없이 벌어지고, 때마다 판단은 카를라의 몫이다. 설상가상 동료 교사들은 카를라의 원칙주의적인 태도를 두고 은밀한 뒷담화를 하고, 아이들은 학생 신문을 동원해 루머를 퍼뜨리며 카를라를 마녀사냥 한다. 도덕 딜레마의 시험대는  ‘무엇이 옳은 것일까’ 라는 질문으로 달궈지고, 그 위에서 홀로 춤을 추는 카를라의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주제의식이 응축된 장면을 꼽자면 단연 학부모 간담회 장면이 아닐까 싶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 수술대를 연상시키는 시퍼런 조명 아래서 학부모들에 의해 ‘취조’당하는 카를라는 더 이상 선생이 아니다. 그녀는 차라리 청문회에 세워진 정치인이나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에 가깝다. 아이들의 자리에 앉은 부모들은, 그들 또한 사회라는 교실로 등교하는 아이들임을 상기시킨다. 법정 영화로서 <티처스 라운지>는 ‘누가 도둑인가’ 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끌고가는 범죄 스릴러와는 궤를 달리하는, ‘이 범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윤리적 질문을 고찰하는 도덕적 스릴러이다. 


낙심한 오스카의 손에 카를라가 루빅스 큐브를 쥐어주는 장면이 있다. 큐브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카를라도 큐브를 다 맞추지 못한 채 오스카에게 넘겨준다. 즉, 큐브는 선생이 학생에게 내주는 과제가 아닌, 복잡하게 얽힌 다면적인 문제에 봉착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함께 그것을 해결해 나가자는 도움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또 다른 장면이 등장하는데, 영화 후반부의 체육시간 장면이다. 카를라는 어수선한 반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아이들에게 서로를 의지해서 균형을 맞추는 활동을 시킨다. 한 면이 맞춰지면 다른 면이 틀어지는 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 노력은, 사회의 균형과 윤리적 정의라는 퍼즐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서로에 대한 믿음과 배려를 통해서만 풀어낼 수 있다는 영화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메시지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의 엔딩 장면은 교실에 단둘이 남은 카를라와 오스카를 조명한다. 그들을 포함한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 학생, 부모, 선생이라는 ‘역할’을  맡은, 그러나 같은 딜레마에 빠져버린 어린아이들이다. 결국 우린 모호한 윤리, 단절된 관계, 뒤틀린 소통이라는 루빅스 큐브를 풀며, 사회라는 교실에서 함께 서로를 배워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Previous
Previous

<Phantom Thread> 배고픈 소년, 헐벗은 소녀

Next
Next

<Europa> 유럽의 신음과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