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tom Thread> 배고픈 소년, 헐벗은 소녀
이기상 평론가
<팬텀 스레드>가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인과 관계가 철저히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드콕이 옷감 사이에 자신만의 비밀을 수놓듯, 앤더슨은 장면들 사이에 은밀한 암시들을 숨겨놓았다. 그것은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이라는 옷감 아래에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무의식적 동기라는 실오라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행위이다. 인물들 발밑에는 그들의 잊혀진, 부정하고픈 욕망들이 요동치고 있고, 스크린 저편으로는 또 한 편의 영화가 유령처럼 흐르고 있다.
1950년 런던, 우드콕은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이다. 그는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알마를 만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우드콕의 이전 연인들처럼 알마는 그의 저택에 머물게 되고, 우드콕과 그의 누나 시릴의 관심 같은 감시를 받아가며 연애와 적응을 병행해 나간다. 초반에 알마는 전형적인 완벽주의자이자 신경증자인 우드콕에게 통제당하는 듯 하나, 곧 둘 사이 힘의 역학은 완전히 뒤집히고 만다. 독버섯을 통해.
우드콕은 드레스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에게 직업은 돈벌이 이상의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 첫 데이트에서 우드콕은 알마에게 느닷없이 그의 어머니에 관해 묻고는 자신의 양복 가슴팍을 가리키며 자신의 어머니는 그곳에 있다고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옷 안감 속에 물건들을 숨기곤 했어... 내 양복 가슴팍에, 어머니의 머리카락 한 줌을 가지고 있어. 어머니를 항상 가까이 두기 위해서야. 나에게 이 일을 가르쳐준 것도 어머니였어.” 옷감 속 깊숙이 바늘을 찌르고 빼내기를 반복하는 일, 드레스의 은밀한 구석에 비밀을 숨겨놓는 일은 우드콕에게는 엄마와 관계를 맺는 행위인 셈이다. 알마가 왜 아직 결혼하지 않았냐고 묻자 ‘나는 드레스를 만드는 사람이야’ 라고 답하는 이유도 여기있다.
시릴은 우드콕이 어머니 환상을 투사하는 대상이다. 우드콕의 유사 어머니로서 시릴은 그를 통제하고 훈육하는, 즉 그의 마조히스트적 박해 환상을 채워주는 여성인 것이다. 동생의 유아적인 연약함과 결핍을 꿰뚫고 있는 시릴이 그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우드콕이 알마에게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혀보는 장면에서 시릴이 들어와 우드콕이 줄자로 재는 알마의 치수를 받아 적는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장면인가! 새로운 연인의 ‘치수’를 엄마와 함께 센티미터 단위로 재는 작업이라니. 또한, 유사 모친과 함께 새로운 연인을 낱낱이 해부하는 과정은 우드콕에게는 엄마와 ‘나의 마음을 훔친, 즉 위협적인 존재’를 숫자로 치환 될 수 있는 친근한 작업물로 변용시킴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으로서 읽을 수 있다. 시릴과 함께 우드콕은 알마에게 그들 집안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그녀에게 수치심과 취약함을 주입시킴으로써 자신의 근원적 불안을 (팜므 파탈로 상징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 잠재우는 무의식적 행동이자 아마도 새로운 연인이 나타날 때마다 반복해온 그와 ‘엄마’의 의식儀式 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중반까지 우드콕과 알마의 관계는 시릴과 단단히 엮여있어, 겉으로만 우아하고 수면 아래로는 기이하게 비틀린 쓰리썸의 연애를 하게된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흔히들 함축적으로 표현한답시고 섹스 장면을 남용하는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섹스는 우드콕이 시릴과 함께 알마의 치수를 재고 드레스를 입히는 장면들로 은유된다. 우드콕에게 성과 직업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불안과 통제는 그의 오래된 존재 방식이자, 직업적 성공의 비결이다. 따라서 우드콕의 연애는 상대를 통제하고 ‘자신의 드레스에 맞게끔’ 길들이는 과정이다. 한 예로 우드콕과 시릴은 알마에게 아침식사 도중 소리를 내면 안된다는 ‘룰’을 알려주지 않는다. 룰을 어기면 돌아오는 남매의 훈육적인 반응을 통해 우드콕의 연인은 우드콕의 저택과 드레스에 맞게끔 길들여진다. 연인이 그의 드레스가 너무 조여서 숨을 쉬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이만 저택을 떠날때가 된 것이다.
‘드레스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우드콕은 자신이 치유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저주를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과, 그로 인해 매번 반복되는 연애의 실패라고 읽을 수 있다면, 알마는 드디어 그의 패턴을 교란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녀는 자존심과 고집이 세고, 따라서 쉽게 자신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드콕의 전 연인들과 다르다. 우드콕의 저택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런웨이 쇼가 끝나고 심신이 지친 우드콕에게 알마가 ‘내가 운전해 줄게요’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알마의 통제’를 상징하는 라이트모티프 피아노 선율이 처음으로 울려퍼진다. 즉, 알마가 우드콕을 대신해 운전대를 잡는 장면을 분기점으로 그녀는 시릴이 오래전 간파했던 우드콕의 본질을 서서이 깨닫게 된다. 알마는 그의 의식적인 욕구가 아닌 무의식적 필요를 이해하게 되는 바, 즉 ‘전능한 어머니의 품에 무방비 상태로 안겨있고 싶다’ 라는 영유아적 환상의 냄새를 맡게되는 것이다.
드레스와 함께 우드콕의 저택은 영화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언급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주인공이다. 우드콕의 무의식을 그의 저택으로 은유할 수 있다면, 영화 중반에 잠시 등장하는 그의 스폰서이자 저택의 지배인인 거부 바바라 로즈는 말 그대로 우드콕 정신구조의 실 소유주인 셈이다. 다소 뜬금없이 영화에 개별적인 에피소드로 삽입된 듯한 이 사건은 왜 필요했을까? 바바라 로즈의 에피소드는 우드콕의 과거 속 엄마와의 기억과 섬뜩할 만치 닮아있다. 열 여섯살적 우드콕은 엄마의 두 번째 결혼식을 위해 그녀를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준 적이 있다. 바바라 로즈의 에피소드 또한 우드콕이 그녀의 두 번째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내면은 결핍과 우울로 붕괴된 알콜릭 바바라 로즈는 우드콕을 자신의 결혼식에 초청하고, 그곳에서 술에 절어 우드콕의 드레스를 입은 채 잠에 든다. 알마와 함께 우드콕은 바바라의 드레스를 벗겨버리고, 이후 우드콕은 활기를 되찾는다. 바바라 로즈가 우드콕의 ‘영혼의 집’의 주인이라면, 그녀는 그의 병적으로 비틀린 내면의 여성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알마와 함께 바바라에게서 드레스를 벗겨버리는 행위는 우드콕에게는 병든 내면의 여성상에게서, 즉 왜곡된 어머니의 이미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영적 구원의 과정이 된다.
알마와 우드콕에게는 또 하나의 극복되어야 할 허들이 있으니, 우드콕이 시릴에게 투사한 어머니 이미지를 벗겨내는 일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우드콕의 유아적 환상을 시릴에게서부터 알마에게 전이시키는 과정이다. 우드콕의 전 연인들은 기분이 좋아진 우드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것인 반면, 알마는 시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때 우드콕을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결심한다 (의뢰인 모나 공주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우드콕의 모습에서 알마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탓이기도 하다.) 알마는 모두를 일찍 퇴근시키고 우드콕과 단 둘이 남아 그를 위해 준비한 저녁식사를 차려준다. 그런데 우드콕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준비한 음식들이다. 우드콕이 혐오하는 버터로 아스파라거스를 요리한 디테일에서 우리는 알마의 진정한 의도 -서프라이즈는 우드콕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알마가 둘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힘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이자, 우드콕의 박해환상을 충족하려는 무의식적 행동이다- 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우드콕은 알마의 시도를 서프라이즈보다는 쇼크로 받아들이고 분노한다. 모두가 저택을 떠난 것을 알게 되자 그가 하는 첫마디는 ‘시릴은 어디있어?’이고 이후로도 시릴이 몇시에 떠났는지, 그녀가 언제 돌아올 것인지 묻는다. 우드콕에게는 ‘연인’과 ‘집’에 둘만 남겨지는 상황이 극도의 불안을 초래한다. 우드콕의 무의식 속에서 이 단순한 현실은 ‘나의 집 (정신구조)을 시릴 (어머니)가 떠난 것’이고 ‘그것도 알마 (한낱 연인)가 내 엄마를 내쫓았다.’ 따라서 그의 당연한 반응은 ‘어떻게 감히! 당장 내 집에서 나가!’가 된다. 분노한 우드콕이 알마에게 소리치는 독설 속에도 그의 무의식에 대한 힌트가 도사리고 있다. ‘여기는 내 집 아니었나? 여기는 내 집이지 않나? 아니면 누가 나를 적진 뒤의 외국 땅에 떨어뜨린 걸까? 나는 사방에 둘러싸여 있어.’ 이 단어 선택은 중년의 언어인가? 무방비 상태에 놓인 영유아의 감정에 가깝지 않은가?
알마가 우드콕의 핵심을 꿰뚫는 순간부터 사랑 (또는 관계 전반)에 대한 영화의 주제의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관계의 초반에 우드콕은 알마를 그의 드레스에 맞게 구속하는 ‘주인’과 같은 역할을 맡고, 알마는 자진해서 그의 ‘피지배자’로서의 장단을 맞춘다. 그러나 알마는 우드콕의 무의식적 욕구를 깨달음과 함께, 그와의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를 -임시적으로, 주기적으로- 해쳐야 한다는 역설에 다다른다. 그를 연약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알마는 몰래 그에게 독버섯을 먹이고, 우드콕은 구토와 열병에 시달리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를 보필하러 온 알마에게 우드콕이 자신이 뭔가 잘못 먹었다고 말하는 반면, 시릴에게는 음식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마가 본능적으로 짜놓은 ‘무방비 상태의 아이와 무조건적으로 보살피는 엄마’의 역할놀이에 대한 우드콕의 무의식적 응수로 볼 수 있다면, 우드콕은 시릴에게로부터 처음으로 비밀을 숨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드콕은 알마와만의 은밀한 비밀 -그녀가 자신을 아기 상태로 돌려놓고 있다라는 은연중의 인지- 을 시릴로부터 숨기고, 알마는 시릴의 면전에 방문을 닫아버린다. 이제 두 연인의 자진적, 자기 기만적, 은밀한 역할 놀이가 막을 올리는 것. 그의 박해 환상과 그녀의 구원 환상이 서로의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섹스를 시작한다.
자크 라캉의 이론대로 사랑을 양방 간의 환상 투사 행위로 볼 수 있다면, 사랑의 굳건함은 환상의 지속력에 달려있다. 환상 이미지의 투사가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부터는 연인이라는 두 ‘연극 배우’가 얼마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느냐에 연극의 생명이 달려있다. 때문에 배역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나타나면 배우들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게 된다. 시릴이 부른 닥터 하디를 우드콕과 알마가 극구 내쫓는 이유도 여기있다. 닥터 하디에 대한 그들의 방어적인 태도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할놀이의 몰입을 방해하러 온 이물질을 함께 처단하는 행위이다. 이후 닥터 하디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의사로서의 예의와 전문성으로 일관했을 뿐임에도, 우드콕과 알마는 그를 적대시한다. 바로 그 의사로서의 전문성이, 우드콕을 치료하여 우드콕과 알마 사이에 갓 자리잡은 ‘병자-구원자’ 또는 ‘아이-엄마’의 프레임을 위협할 수 있는 적敵 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알마와 우드콕의 사랑이 정점을 찍는 순간은 알마가 우드콕의 ‘엄마’가 되는 장면이다. 독버섯으로 인해 열병에 시달리는 우드콕은 죽은 엄마의 환영을 보게된다. 그는 환영에게 그리움을 고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마가 방에 들어온다. 우드콕의 시선 속에 ‘엄마’와 ‘알마’가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고, 알마가 젖은 수건을 들고 그를 돌보러 다가온다. 엄마의 유령에 형체를 부여해 온 (그리고 환상이 깨지면 버려진) 우드콕의 전 연인들과 다르게 알마는 엄마의 유령을 온전히 빙의한 ‘완벽한 그녀’가 된 것이다. 그 바로 다음 장면이 우드콕이 알마에게 청혼하는 장면인 것은, 연인 사이 역할 놀이의 성공이자 환상 충족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행동일 것이다.
결혼을 기점으로 알마와 우드콕 사이 힘의 역학은 완전히 뒤집힌다. 수십년간 자리잡아 온 집 구조가 송두리째 뒤집히는데 가구들이 멀쩡할리 없듯, 우드콕의 정신 또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우드콕이 시릴을 찾아가 내뱉는 하소연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 둘이서 이 집을 지었어. 그런데 이제 그녀가 온통 다 뒤집어 놓고 있어."
<팬텀 스레드>의 결말은, 두 연인이 사랑을 지켜내는 방법을 찾았다는 점에서 해피엔딩을 이루고, 그 방법이 독버섯이라는 점에서 ‘해피’는 무산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은 우드콕이 알마가 대접하는 식사가 독버섯 요리임을 확신하면서도 그것을 먹는 장면이다. 의상을 스케치하는 우드콕과 식사를 요리하는 알마의 모습이 교차편집된다. 고요하게 쇼트들이 쌓이고 그렇게 모인 시퀀스가 요동친다. 우드콕의 드레스와 알마의 요리가 서로에 대한 환상 투사 행위임이 분명해지는 장면. 무의식적 역할 놀이의 본질이 의식의 막을 뚫고 폭력적으로 침투하는 순간. 우드콕이 수긍하며 요리를 먹는 것, 알마가 수긍하며 드레스를 입는 것. 이것이 사랑의 민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