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ropa> 유럽의 신음과 속삭임
이기상 평론가
‘신은 어떤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나요?’
‘믿지 않는자들이요. 어떠한 편도 들지 않는 미적지근한 자들 말입니다.’
세계 2차대전이 막 끝난 1945년 프랑크푸르트에 미국인 레오 케슬러가 도착한다. 삼촌의 도움으로 독일 젠트로파 열차의 차장으로 취직한 레오는 젠트로파 회장 맥스 하트만의 딸 케이트 하트만과 사랑에 빠진다. 리오는 케이트가 일명 ‘웨어울프’라고 불리는 전후 나치조직과 연루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갖지만 애써 모른채한다. 하트만의 친구 미국인 대령이 레오에게 접근해 기차에서 나치 가담자를 색출하는 일을 맡아줄 것을 지령한다. 그런데 젠트로파의 회장 맥스 하트만은 전시에 나치에 가담한 전적이 있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정작 대령은 어느 유대인을 가짜 ‘증인’으로 세워 맥스에게 나치 전적이 없으며 유대인들을 돕는 독일인이었다고 거짓 증언을 시킨다. 그렇게 맥스는 위기를 모면하지만, 수치심에 결국 자살한다. 한편 케이트는 리오에게 ‘웨어울프’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의혹이 풀린 리오는 그녀와 결혼한다.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케이트가 실종된다. 웨어울프의 수장은 자신이 케이트를 납치했다며 그녀를 볼모로 삼아 리오에게 젠트로파 열차를 폭발시키라는 지령을 내린다. 폭탄을 설치한 리오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폭발물을 일시 해지하고 웨어울프들은 체포된다. 웨어울프들을 조사한 결과, 케이트는 현재까지 웨어울프의 일원이었으며 인질극과 열차폭발 모두 그녀가 동조한 계획이었음이 드러난다. 자신을 속인 케이트에 대한 배신감과 자신을 멸시하는 열차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리오는 홧김에 총을 들고 열차를 정지시킨다. 때마침 해지된줄 알았던 폭탄이 터져버리고 열차는 강물속에 가라앉는다. 익사한 레오의 시체가 저 멀리 바닷가 어딘가로 떠내려간다.
레오 케슬러는 영락없는 카프카에스크 영웅이다. 그에 대해서는 뉴욕에서 온 독일계 미국인이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젠트로파의 차장으로서 자신의 임무가 독일의 재건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겪지 않은채 독일의 ‘0년 (Year Zero)’에 대한 기대감에만 부푼 영원한 이방인인 셈이다. 독일에 떨어진 미국인이자 폐허와는 분리된 열차의 차장이며 나치들에 둘러싸인 이상주의자인 레오만큼 부조리하고 희극적인 인물이 있을까? 카프카 주인공의 단골 이니셜 K로 시작하는 이름의 케슬러는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듯 그가 ‘아는것의 전부라고는 열차 차창 밖으로 본 것 뿐’이다. 그는 독일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케이트와 웨어울프의 숨은 의도는 더욱 알지 못하며 혼란 속에서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의 일차원적 목격자이다. 미국인으로서 독일의 재건을 도우려다 오히려 네오나치들의 수하 노릇을 하는 케슬러는 ‘믿지 않는자’이며 ‘어떠한 편도 들지 않는 미적지근한 자’인 셈이다. 따라서 열차 안에 갇혀 물속에 가라앉는 케슬러의 모습에서 종교적 심판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에 잠긴 기차에서 케이트 하트만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속 케이트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자신이 웨어울프의 일원임을 밝히는 장면이다. 그녀는 좌석에 수갑으로 묶여있다. 그녀는 레오와 마찬가지로 죽었을까? 한가지 단서가 될 수 있는건 그녀가 전형적인 필름누아르 속 팜므파탈이라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레오는 케이트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유와 유혹의 목적을 의심하고, 곧 웨어울프와 그녀를 연결지으며 그녀의 도덕성을 의심한다. 정사를 나누기 전 케이트는 웨어울프의 일원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양심고백’을 하여 레오의 의심이 일단락 해소되는가 싶다. 사랑에 빠진 레오는 케이트에 대한 의혹을 반쯤 눈감은 채 결혼하지만 그녀에 대한 불안한 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참 행복이 절정일 때 케이트가 실종되고 레오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모험에 떠나지만 결국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나며 레오와 케이트 모두 비극을 맞이한다. 하나같이 1940년대 필름누아르 작품들이 연상되는 플롯 지점들이다. 케이트는 웨어울프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레오를 철저히 이용한다. 따라서 아마도 그녀는 팜므파탈의 전형적인 운명대로 남자들의 공포에서 비롯된 죄의식이 투영된 채 벌을 받는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죄의식을 내면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수갑이 채워진 자신의 운명과 ‘낮에는 사람이고 밤에는 늑대인간’인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레오에게 자신의 사랑은 진짜였다고 밝히는 동시에 지령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 레오의 무능을 탓한다. 죄의식보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것이다.
영화는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스타일을 실험한다. 특히 다양한 이미지를 겹치거나 백 프로젝션 기법의 활용이 두드러지는데, 영화 초반 이미 이를 예고하는 듯한 쇼트가 있다. 바로 독일에 도착한 레오가 차장 유니폼을 입어보는 쇼트이다. 이 쇼트에서 우리는 화면 정 가운데 놓인 거울에 비친 레오와 거울을 둘러싼 뒤의 배경을 한 화면안에 보게 된다. 이는 크게 두가지 효과를 낳는다. 나래이터가 레오를 ‘당신’ 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관객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메타적인 효과를 가지는 한편 거울과 현실이라는 분리된 공간을 통해서 레오가 사실상 주위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유로파> 속 백 프로젝션 기법은 영화의 공간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 물체의 크기와 비율을 무시한 채 사용되는 ‘겹침’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변증법적인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기법은 과거 고전 영화들에서는 현실감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눈속임으로 사용되었다면 90년대에 들어 폰 트리에의 손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시각적 경험에 대한 고찰의 수단으로 변용된 셈이다.
감독이 백 프로젝션과 겹침 기법을 사용한 맥락은 영화사를 넘어 유럽의 의미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반영한다. 영화는 독일을 배경으로 하지만 사실상 유럽 전체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폰 트리에 감독이 ‘독일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유럽이죠’라고 언급한 점과, 극중 레오가 실제 독일 땅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공간의 통제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독일로 상징되는 유럽이라는 공간은 가닿을 수 있는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호한 공간으로 표현된다. 또한, 폰 트리에는 유럽을 하나의 통합된 공간이 아닌 분열되고 모순적인 공간으로 제시한다. 흔히 1945년의 독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뉘앙스에서 0년이라고 일컫곤 하는데 이는 유럽이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내포한다. 반면 폰 트리에는 <유로파>를 통해 유럽의 재활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을 거부하는 듯하다. ‘현대’적으로 촬영된 인물들 뒤로 낡은 필름 영상이 백 프로젝션 되는 이질적인 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기이하게 상처투성이로 남은 양자 사이의 괴리를 시각화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폰 트리에는 유럽의 새출발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유로파> 속에 전후 독일의 폐허 이미지를 포함시키기를 거부한다. 영화는 전후 독일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시기에 개봉한 로셀리니의 <독일 0년>과 같은 작품들에 흔히 등장하는 폐허 이미지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폐허 이미지는 독일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0년’의 허구적 개념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로파>는 폐허 이미지를 생략함으로써 유럽이 과거의 수치를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서사를 거부하고, 과거의 그림자가 여전히 현재에 드리워져 있음을 강조한다.
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영상 또한 눈에 띄는 스타일적 실험이다.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순간이나 (아이가 열차의 탑승객을 살해하는 장면, 레오와 케이트가 키스하는 쇼트 등) 내러티브적으로 중요한 복선 (열차의 비상 브레이크, 폭탄 든 소포) 들의 한에서 사용된다는 형식적인 패턴을 띈다. 컬러가 사용되는 두가지 조건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레오가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막스 폰 시도우가 목소리를 맡은 영화의 나래이터는 영화 내내 레오에게 (동시에 관객에게) 최면을 걸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최면적 특성에 대한 담론을 유도하면서도 레오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듯한 숙명론적 뉘앙스를 전제한다. 그런데 컬러가 사용되는 지점들, 즉 인물들의 감정이 과잉되는 순간들과 레오의 자유의지가 작동할 여지가 있는 복선들은 주인공의 최면을 깨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말해 레오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올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감독은 컬러와 나래이션을 기교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물의 다층적인 의식활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형식으로 설계한 것이다.
폰 트리에의 치밀한 시각적 구성은 요아킴 홀벡 음악 감독의 정교한 음악을 만나서야 제 효과를 발휘한다. <만덜레이>, <도그빌>등 라스 폰 트리에의 많은 영화들 속 사운드트랙을 맡은 요아킴 홀벡은 인물들의 감정적 요동을 인상주의적으로 포착한다. 젠트로파 회장 맥스 하트만의 자살과 케이트와 레오의 정사를 교차 편집한 시퀀스를 예로 들수 있다*. 홀벡의 음악은 장면에 따라 날카롭고 히스테리컬한 신음과 낭만주의적이고 애수에 가득찬 속삭임을 오가며 정신분열적으로 양극화된 상황을 표현해 낸다.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정서인 공포와 애수, 그리고 <유로파>에 담긴 유럽의 치유될 수 없는 분열은 어쩌면 치열하게 요동치는, 쉽사리 ‘어떠한 편도 들지 못하는’ 가냘픈 바이올린 줄과 같은 무언가는 아닐까.
*생명을 창조하는 행위와 죽이는 행위가 교차되는 편집은 이후 라스 폰 트리에의 2009년작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부모의 정사와 아이의 추락사가 교차되는 형식으로 반복된다.
인용
Galt, R. (2005). Back Projection: Visualizing Past and Present Europe in “Zentropa.” Cinema Journal, 45(1), 3–21. http://www.jstor.org/stable/3661077
von Trier, L., BADLEY, L., & Badley, L. (2010). Interviews with Lars von Trier. In Lars von Trier (pp. 155–180).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http://www.jstor.org/stable/10.5406/j.ctt7zw5gq.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