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nce of Reality> 연금술로서의 삶
이기상 평론가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의 The Dance of Reality는 성장 영화이지만 그 주체가 성인, 그것도 스탈린 정권에 세뇌당한 한 공산주의 장교의 성장 영화라는 구체성에 있어서 여느 성장 영화와는 궤도를 달리한다. 더 나아가 영화는 호도로프스키의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펠리니의 Amacord (1973) 나 트뤼포의 400 Blows (1959) 와는 다르게 성장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버지로 설정한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은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하고 억압했던 유년시절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 영화제작에서 어느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창작자가 그 인물이 어떤 이유에서든 ‘들여다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판단했다는 것이고, 자신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아버지를 그러한 대상으로 선정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호도로프스키는 왜 자신의 자전적 영화의 대부분을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는데 바쳤을까?
영화는 어린 호도로프스키를 따라가며 시작된다. 긴 곱슬의 금발머리 차림의 그는 여리고 섬세한 소년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열렬한 스탈린 정권 지지자로 예민한 호도로프스키를 학대하고 억압했다. 호도로프스키의 어머니는 때로 정신분열적인 모습을 보이며 어린 아들에게 본인의 죽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기행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치유를 비롯한 신비한 능력을 지닌 여자였다. 어린 소년을 둘러싼 마을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 광대들, 기인들을 비롯한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차갑고 억압적인 세계관과는 대조를 이루는 군상에서 영적인 소속감을 느끼며 호도로프스키는 양분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아이에게 세상은 분열적으로 다가오는데, 영화는 아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마술적 사실주의 연출로 표현한다. 아들이 ‘남자답게’ 간지럼을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아버지가 깃털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그의 손에 깃털이 마법적으로 나타난다던지, 아버지가 호도로프스키를 강제로 이발시키는 장면에서 머리카락이 가발이 되어 벗겨진다던지 하는 초현실적인 연출은 아이의 상상력을 나타낼 뿐 아니라 어린 호도로프스키가 현실과 마법이라는 양분된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의 내면을 시각화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과 억압의 세계, 어머니와 마을의 기인들로 형상화된 마법과 신비의 세계라는 한 덩어리의 반쪽들은 카를 융이 주장한 아니마와 아니무스, 인격의 연금술적 융합이라는 테마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다분히 신화적이고 심리학적인 색을 띄고 있다. 실제로 감독 본인이 이따금씩 영화에 출연해 나레이션으로 극을 이끌고 유년시절의 자신을 안아주기도 하며 작품을 하나의 심리학적인 치유의 과정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년에게 찾아온 내적 갈등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막 그의 안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복합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소년 호도로프스키의 이야기인듯 시작한 영화의 플롯은 중간부에 다다르자 아버지 제이미의 궤도에 정착한다. 제이미는 우파 정치인 이바네즈를 암살하기 위해 타지로 떠나게 되고, 이로서 영화의 플롯은 각각 소년과 아버지의 갈래로 나누어진다. 둘 중 감독은 아버지의 플롯에 더욱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는 여느 영화가 중반부에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서사로 전환하려고 정치적 암살 서사를 끼워넣는 식의 꼼수와는 무관한 의도로 결정된 설계이다. 타지에 도착한 제이미는 곧바로 긴장감 넘치는 암살 작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해해야할 이바네즈의 애완말을 돌보는 말 관리사가 된다. 이바네즈의 애완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제이미가 그의 상처투성이었던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적극적으로 제이미 내면의 인간성을 파헤치고 더욱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제이미가 이바네즈를 끝내 죽이지 못하고 충격으로 인해 손이 굳어버리는 장면부로 영화는 제이미를 가부장적인 스탈리니스라는 이데올로기적 껍데기에서 벗겨내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와 의식적 강박 사이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히스테리와 광분의 피해를 받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새로이 그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은 소년 호도로프스키가 ‘암흑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있다’며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엄마가 그를 타이르며 그의 벗은 몸에 검은 구두약을 칠해주는 장면에 있다. 주목할 점은 공포에 질려있는 호도로프스키를 담은 쇼트 바로 직전의 장면 전환이다. 제이미가 이바네즈를 죽이지 못하고 두 손이 마비되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쇼트는 그가 점점 다가오다 카메라 렌즈를 덮어 화면을 암전시키면서 종료된다. 제이미가 덮은 시커먼 암흑에서 소년 호도로프스키가 공포에 질린 채 나타나는 장면 전환은 아버지의 혼란스런 정체성과 뿌리깊은 죄의식, 신을 부정 함으로써 마주하게 된 실존적 공포 등이 마치 유전되듯 아들의 내면에서 싹트기 시작함을 알린다.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뿌리의 영적 고통을 짊어진 채 각자 다른 줄기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수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아이의 잃어버린 자기의 반쪽을 되찾고 영적인 구원을 얻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 된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이야기야말로 진정 호도로프스키 본인의 성장 영화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