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lipse> 나는 피아노 건반이 아니기에
이기상 평론가
참을 수 없는 적막과 텁텁한 공기. 리카르도의 거실에서 비토리아는 그에게 이별을 선고한다. 안토니오니는 정적, 선풍기 바람, 그리고 거울 등의 단순한 재료들을 활용해 공허하고 스러져가는 두 인물의 내면과 관계를 빚어낸다.
리카르도의 집을 나선 비토리아는 공허한 도심을 거닐다가 이웃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엄마가 상주하는 증권거래소에 들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거래소에서 일하는 피에르와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가 그토록 복잡한 해석들을 요구한다니. 어째서일까?
비토리아
비토리아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장면이 있다. 리카르도와 이별한 비토리아는 어느 이웃 여자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이웃 여자는 어릴적 케냐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곳을 자신의 진정한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집안에는 온갖 케냐 원시부족적인 물건들이 굴러다닌다. 비토리아는 그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내 자신을 검게 칠하고 장신구로 치장하여 케냐 원시부족의 코스프레를 한다. 삭막하고 공허한, 그래서 ‘사랑마저 어려운’ 유럽의 도시에서 탐미하는 상상속 케냐는 비토리아의 이상, 즉 본능과 해방이 지배하는 환상의 대상이다. 이를 간파한 이웃은 자신에게 소중한 ‘집’이 경박한 오락거리로 소비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나타낸다. 비토리아는 모더니티에 접어든 유럽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이고, 1962년 유럽의 황폐한 도심속에 갑자기 뚝 떨어진 것 같이 혼란스런 인물이며, 잃어버린 자신의 전사前史 를 찾기 위해 서성이는 현대적 영웅이다.
피에르
피에르는 호수에 가라앉은 자동차 운전석의 시신을 바라보며 차에 난 흠집, 모터, 돈과 시간을 걱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능력있고 가차없는 자본주의의 총아이고 애인의 바뀐 머리색이 마음에 안들어 차버리는 연애시장의 폭군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자 노력한다. 전쟁터같은 증권거래소의 폭력적인 운동 속에서,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매수자와 매도자의 외침 속에 자신을 매 순간 내던지며 피에르는 실존주의적 공포를 애써 외면한다. 잠시라도 멈추면 직면하고 싶지 않은 그 무언가가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에 그는 숫자와 욕설, 종잇장과 비명에속에 자신을 감추고 싶은 것이다.
비토리아와 피에르의 관계
얼핏 상극으로 보일 수 있는 비토리와 피에르는 본질적으로 같은 공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두 파편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에서 나타난다. 어떻게 외면할 것인가? 어떻게 도망칠 것인가? 어느날 비토리아는 친구들과 경비행기로 여행을 떠난다. 지상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빅토리아는 안정감을 느끼는 듯 하고 어린아이같은 호기심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그녀는 황폐해져가는 지상보다는 하늘 위 구름속에서, 상상속의 원시세계를 염원하듯 소속감을 갈구하는 것이다. 반면 피에르는 지상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증권거래소는 ‘죽은듯한’ 도심속에서 유일하게 동물성과 생명력이 나타나는 장소이다. 오르고 내리는 숫자를 광신도적으로 쫓는 행위 속에서 군중은 잠시나마 공포를 잊고 생을 모방한다. 돈이라는 유일신이 모더니티 속 원시부족을 춤추게 하는 음악이 되었고, 피에르는 예민한 젊은이의 거대한 공포를 안고 누구보다 열심히 그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다.
따라서 비토리아와 피에르는 하나의 공포를 두고 반대편에 서있는 인물들이다. 애수에 찬 몽상가와 숫자를 쫓는 물질만능주의자의 원형을 띄는 두 인물은 육체적 합일을 통해 위안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L’Avenntura(1960) 에서의 정사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텅빈 금속끼리의 부딪힘, 그 이상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영화 속 건축물과 자연풍경은 현대인의 내면 풍경의 가시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실내/실외의 공간적 대조가 암시적으로 섬뜩하다. 리카르도의 거실에서 텁텁한 선풍기 바람을 쐬던 비토리아는 이제 피에르와 함께 뻥 뚫린 야외에서 자연의 바람을 맞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서있는 야외는 아스팔트와 건물벽들, 철근구조물등으로 둘러싸인 채 기이한 폐쇄공포를 자아낸다. 비토리아는 정말 리카르도의 거실을 탈출한 것인가? 이 세상 어딜 가면 그녀의 마음이 채워질까? 케냐?
비토리아와 피에르를 초월한 엔딩
비토리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도 종종 홀로 떨어져 고독과 우울감에 젖는다. 카메라는 이런 그녀의 순간들을 신비스럽고 비밀스럽게 포착한다. 시공으로부터 붕 뜬듯한 이 장면들은 시점쇼트들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비토리아와 그녀의 주변의 ‘무언가’ 사이의 대화장면처럼 느껴진다. 주변을 관조하는 비토리아의 시점쇼트들. 그리고 그녀를 관조하는 ‘무언가’의 시점쇼트들. 누구의 시점인가?
엔딩에 다다르면 비토리아와 피에르는 사라지고 카메라는 홀로 도심을 돌아다닌다.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한 ‘방황하는 카메라’ (#1)는 황폐한 거리 속 낯선 얼굴들을 보여준다. 실로 당황스럽다. 이곳들은 어디이고 이 얼굴들은 누구인가. 카메라의 충동을 따라 무작위로 찍은듯한 도시의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나열된다. 그러나 각 쇼트에는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위험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공기의 꾹 눌린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무언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거리와 사람들을 삼켜버릴듯 드리우고 있다. 그 존재조차 의문부호로 남아버린 두 남녀가 두려워하던 그 무언가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