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ystery of Picasso> 혁명의 준비물은 끝없는 리비도

이기상 평론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천재의 작품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의 신비스러운 창작 과정에 일종의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예술 작품을 체험함에 있어 작품 배후의 작가의 인생 이야기나 영감이 된 인물 등 그 원천은 완성된 작품 만큼이나 우리를 매료시킨다. ‘시나 소설같은 예술과는 다르게 회화는 천재의 작업 과정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습니다.’ The Mystery of Picasso를 감독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이 나레이션을 통해 전하는 그의 작품 의도이다. 클루조의 영화는 일종의 인물 다큐멘터리로, 파블로 피카소의 작업 과정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자 만들어졌다. 


영화는 비밥과 플라멩코 음악 등 피카소의 즉흥적 예술 행위의 예측불허한 성질을 강조하는 음악을 사용한다. 개별적 내러티브처럼 구성된 피카소의 각 그림에 맞춰 음악도 달라지는데, 조르주 오리크의 음악은 피카소의 작업 과정 속 본질적인 에너지를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피카소의 작업에 있어 본질적인 에너지란 어떤 것인가?


피카소는 ‘창조의 모든 행위는 파괴에서 비롯된다’ 라고 말했다. 동시대의 미술 운동인 야수파가 색채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 명암법을 희생키켰다면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런 즐거움을 단념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입체 표현의 전통적인 기법을 전복시켰다. 이러한 파격적인 입체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말한 창조적 파괴 행위란 무엇인가? 영화에 나타난 피카소의 작업 방식에선 흔히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연상시키는 치밀한 계획과 완벽에 대한 추구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날것의 리비도의 방출, 원초적 분노와 파괴 충동, 해체와 재구성에 대한 의지 등이 요동친다.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 74세였던 피카소는 쉼없이, 마치 빙의라도 된 듯 거침없는 에너지로 매 작품을 완성해간다. 노장의 천진난만한 작업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가 원시적 본능을 충실히 따라가는 한 마리의 짐승처럼 느껴지는 한편, 자신의 무의식 속 태고적 이미지 (primordial images) 들과 여과없이 소통을 하고 있는 성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흥적이고 예측불허한 피카소의 창작 태도는 그 결과물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그의 작품들에 유기적인 생명력을 불어넣고 다층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피카소의 작업은 현실의 재현보다는 현실의 배후에서 요동치는 본질적인 에너지를 포착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클루조의 작업은 피카소의 창작 행위 배후의 요동치는 에너지를 포착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한 예술가의 세계에 대한 해석에 대한 또 다른 창작자의 이차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고, 이는 영화에 묘한 입체감을 주어 클루조가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자신의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짐작해 볼 수 있도록 한다. 


피카소의 마지막 그림 시퀀스는 영화의 의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피카소는 지중해의 풍경과 군상들을 그리는데, 그림이 완성되어갈 즈음 무언가를 또 덧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그림으로 변화시킨다. 그의 그림에서 완성품은 없다. 그저 파괴와 창작의 맞물림을 통한 지속적이고 영원한 변형의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완성품을 기다리고 있을 관객을 조롱이라도 하듯, 피카소는 온전한 작품 대신 무한한 변형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자신의 창작 과정의 신비로움에 서명하며 영화의 암막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인용:

서양미술사 (저자 E.H. 곰브리치)

Previous
Previous

<L’eclipse> 나는 피아노 건반이 아니기에

Next
Next

<La Ronde> 관계의 천진한 회전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