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Rooms> 너는 흙에서 나왔으나 픽셀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기상 평론가
급격한 기술의 발전과 2019년 팬데믹으로 인해 현대인은 그 어느때 보다도 고립되었고, 현실과 화면 속의 삶이 동일하게, 또는 화면 속을 더 실제같이 느끼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 세계인이 동시에 고립을 경험했고 테크놀로지에서 실존적 접촉을 찾던 팬데믹 도중 제작된 Red Rooms는, 스산히 퍼져나가고 있던 디지털 시대의 미묘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Red Rooms는 기존에 수없이 만들어졌던 범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영화가 아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는 여느 법정 드라마처럼 시작된다. 3명의 소녀를 잔인하게 고문, 살해하고 이를 촬영해 다크웹에서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피의자 슈발리에를 중심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배심원들을 향한 변호사와 검사의 진술이 이어진다. 영화의 첫 20분 동안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재판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슈발리에의 유무죄 판결을 놓고 벌어지는 법정 공방 스릴러를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법정을 나서면서부터 영화는 방청객 중 하나였던 Kelly-Anne을 따라가고, 그녀에 대한 집요한 인물탐구로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Red Rooms는 법정 드라마와 범죄 스릴러 장르의 표피를 쓴 치밀한 인물 탐구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 Kelly-Anne은 슈발리에에게 도착적인 흥미를 느끼고, 매일 그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법원 앞에서 노숙을 하는 등 괴이한 행동들을 감행한다. 영화 내내 그녀의 동기는 모호하지만, 감독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하이브리스토필리아 (범죄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심리적 이상 증상) 를 연상시키는 행동들을 한다 (#1). 관객이 Kelly-Anne에 대해 알게 되는 정보라고는 그녀의 직업이 모델이고, 그녀는 매일 슈발리에의 재판을 방청하러 나가며, 일을 하거나 재판을 방청하지 않는 시간동안은 깔끔히 정돈된 집에서 모니터를 통해 슈발리에 사건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한다는 것 정도이다. 주인공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할 수록 그녀는 특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공허한 눈빛과 어딘가 기계적인 행동거지로 더욱 많은 물음표들만 남긴다. 따라서 Red Rooms는 슈발리에의 유죄 여부에서 멀어져 켈리앤의 정체와 그녀의 의도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통해 영화는 기존의 법정 스릴러 장르를 비튼 현대적 인물 탐구 영화로 거듭난다.
Red Rooms는 플롯 뿐 아니라 영화적 ‘시선’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독창적이다. 영화 예술에서 연출자는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거나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적 시선을 통제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두려움을 전달하기 위해 아이의 시점 쇼트를 사용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아버지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다. 또, 인물 간 대화 장면을 촬영할 때 화자와 청자의 표정과 반응을 섬세하게 관찰하기 위해 쇼트 리버스 쇼트를 사용할 수 있고, 인물 간 유대감 등을 형성하기 위해 오버 더 숄더 쇼트를 이용할 수도 있다. 같은 개념의 연장선에는 영화비평가 시모어 채트먼이 ‘방랑하는 카메라 (wandering camera)’라고 부르는 영화적 시선이 있다. 채트먼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에서 종종 나타나는, 내러티브적 정보 전달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카메라를 표현하기 위해 ‘방랑하는 카메라’ 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영화적 시점은 이후 작가주의적 영화에서 연출자가 자신의 존재를 넌지시 드러내는 제스처로, 또 텍스트 바깥에서 웅변적인 개입을 하는 방법으로 해석되었다. 예로, Psycho (1960)의 인트로 장면은 공중을 가르는 카메라가 창문을 통해 애무하고 있는 연인의 방 속으로 들어가는 쇼트로 시작된다. 이 전지적 관음자의 시점은 앞으로 영화가 다루게 될 ‘관음을 통한 시선의 통제와 폭력’ 이라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이는 플롯 전개의 효율성 뿐 아니라 작가의 작품 전체에 대한 정신분석적 웅변을 내포하고 있는 ‘방랑하는 카메라’ 의 예시이다. 이 독특한 영화적 시선은 여러 공포 영화들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The Shining (1980)의 트래킹 쇼트를 예로 들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호텔 복도를 지나는 인물을 카메라가 트래킹하는 쇼트가 있다. 이 쇼트가 정보 전달적인 목적만 달성하려는 의도였다면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니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카메라는 대니와의 거리를 넓혔다가 다시 좁히는데, 이 의도적인 카메라의 이동은 순간적으로 텍스트에 균열을 일으키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를 암시한다 (#2). 그렇다면 Red Rooms는 기존의 영화적 시점들을 어떻게 독창적으로 활용하는가?
방황하는 카메라가 Psycho(1960)에서는 정신분석적인 은유로, The Shining(1980)에서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암시로 활용되었다면 Red Rooms에서는 현대인의 시선을 표현하는 단서로 볼 수 있다. 영화는 방황하는 카메라와 시점 쇼트를 활용해 현대인에게 적용되는 ‘디지털적 시선’을 포착하는데, 이는 캘리앤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고 결국 그녀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문제 의식과도 맞닿아있다. 영화는 크게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시선을 통제함으로써 우위를 점령하는듯한 기분을 갖게 되는 포식자와 시선의 대상으로 노출되어 욕망의 충족 도구로 전락해버리는 피식자 사이의 역학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켈리앤은 시선의 포식자로서, 세상과 타인을 모두 자신의 시선 속에서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행동한다. 이에 대한 단서로 영화 종반부의 한 장면을 들 수 있다. 장면에서 켈리앤은 슈발리에 사건을 조사하던 중 피해자가 다니던 중학교의 웹사이트에 들어간다. 이 사이트를 비춘 화면은 캘리앤의 시점 쇼트로, 마우스 커서를 트래킹 하며 진행된다. 별 목적 없이 허공을 떠돌던 마우스는 피해자와 같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의 사진을 천천히 가르며 내려간다. 얼핏 방황하는 듯한 이 마우스를 컨트롤하는 켈리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만약 마우스의 경로를 켈리앤의 폭력적인 상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켈리앤은 모니터 속 박제되어 시선의 희생양으로 전락해버린 소녀들을 통제하며 자신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빛나는 사각형 속의 인간들은 픽셀로 구성된 가상의 도구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Red Room 속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해석은 디지털 시대의 인간과 모니터라는 주제로 좁혀진다. 켈리앤은 슈발리에에 관한 정보를 거의 모두 인터넷을 통해 얻어내고, 용돈은 온라인 포커를 통해 벌며, 직업 또한 패션 모델로 자신의 사진을 찍어 브랜드 웹사이트에 기재하여 돈을 번다는 점에서 그녀의 현실은 화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지하철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녀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고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화면에서 눈을 떼는 시간은 법정에 소환된 슈발리에와 피해자 유가족들을 바라볼 때 뿐이다. 한 예외적인 장면에서 켈리앤은 화면을 바라보는 대신 화면을 보고 있는 클레멘타인을 응시한다. 이 시점쇼트는 켈리앤의 아이라인에 상응하는 매치컷이고 불길할만큼 긴 롱 테이크이다. 켈리앤의 시선이라는 동일한 프레임 속에 병치 된 모니터와 인간은 ‘흥미로운 응시 대상’ 이라는 점에서 동급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 봐야 한다. 그녀가 법정의 유리장 속 갇힌 슈발리에,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의 유가족들, 진심어린 관심으로 그녀에게 접근하는 클레멘타인을 응시할 때 짓는 미묘한 표정은 정말로 악의를 숨기려는 의식적인 노력인가? 어둠 속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들여다보는 자의 흐리멍텅한 눈빛이 보이지는 않는가? 혹은 픽셀로 이루어진 가상의 장난감을 바라보는 호기심어린 어느 현대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가?
Red Rooms 속 시선의 주체와 대상, 인간과 모니터라는 주제는 사회학적 논의를 넘어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심리학적 개념과도 연결되어 있다. 클레멘타인이 떠난 이후, 유일했던 소통의 대상이 사라져버린 탓인지 켈리앤의 슈발리에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해진다. 이는 클레멘타인이 떠나는 장면 직후에 이어지는 두개의 쇼트에서 나타나는데, 첫번째는 법정의 방청객석에 앉아 슈발리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켈리앤의 쇼트이고 두번째는 켈리앤의 시점에서 바라본 유리장 속 슈발리에의 쇼트이다. 두 쇼트 모두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구도를 기괴하게 비틀며 줌아웃하는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이 독특한 카메라 움직임에 동반되는 사운드 디자인 또한 주목할만 한데, 마치 촬영하고 있는 대상을 진공상태로 압축시키거나 흡입하고 빨아먹으려는 듯한 소리가 삽입되었다. 이러한 촬영과 사운드에는 화면 속 호기심의 대상을 빨아먹으려는, 통제하고 착취하려는 사디스트적 욕구가 담겨있다. 이 ‘착취하는 카메라’ 는 현대인이 화면 속의 타인을 응시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고, 그 기저에는 완전한 통제자의 위치에서 무력한 상대를 착취하려는 사디스트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Red Rooms의 ‘착취하는 카메라’는 켈리앤의 통제적 시선을 표현하는 도구로서만 사용되지 않고 나중에는 되려 그녀를 겨냥하는 제3의 통제자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종반부에 켈리앤이 빈틈없는 시선의 통제자 또는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가상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유령처럼 묘사되었다면, 이후 그녀 또한 착취의 대상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인 시선의 대상으로 노출된다. 그녀의 이동 경로는 CCTV를 통해 보여지고, 슈발리에의 범행 영상을 손에 넣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사진 찍어 익명의 판매자에게 보내야 하며, 법정 안의 사람들 또한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고 되려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켈리앤의 시선 속 ‘가상’ 이었던 대상들이 그녀의 ‘현실’ 에서 반응하기 시작하며 그녀는 전지적 시선이라는 착각을 박탈당한다. 주인공은 뒤집힌 판도에 공포에 떨면서도 기묘한 쾌감을 느끼는 듯 하다. 영화의 절반이 시선의 통제자와 그의 사디즘에 대한 담론이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자발적 시선의 대상과 그의 마조히즘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가상세계의 현실화, 시선을 둘러싼 사디즘과 마조히즘 등의 테마는 이후 피해자의 코스프레를 하고 그녀의 집에 숨어들어가는 켈리앤의 행동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모니터로만 훔쳐보던 피해자의 집에 직접 들어가는 켈리앤의 행동은 가상세계 속에서만 표출되던 그녀의 음험한 욕구가 현실을 침범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피해자의 집에 들어간 켈리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피해자의 침대에 앉아 셀카 몇장을 찍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수사기관 조차 찾지 못한 슈발리에의 마지막 범행 영상을 잠든 유가족 머리맡에 놓고 떠나고, 몇일 후 슈발리에가 범행을 자백하며 재판은 마무리된다. Taxi Driver (1976)의 아이러니한 엔딩이 연상되는 안티 히어로적 엔딩이다. 그렇다면 이 모호한 엔딩 속 켈리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그녀에게는 무의식적 속죄 욕구가 작용하고 있었을 수 있다. 패션 모델로서 켈리앤은 화보 촬영을 할 때마다 카메라의 번쩍이는 플래시에 온몸을 내맡기며 기괴하게 몸을 비튼다. 그녀의 행동과 표정에는 고통스러움과 황홀감이 동시에 묻어나는데, 이를 그녀의 속죄 행위로 본다면 그녀는 자신을 모니터 속에 노출시키므로써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 온통 내맡기는 ‘수행’을 하고, 그로써 자신의 피해자들의 입장에 서게 된 듯한 마음으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종의 마조히스트적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는 셈이다. 한편 켈리앤을 디지털 지형을 유랑하며 실체를 갈구하는 유령으로 본다면 피해자의 방에서 코스프레를 한 채 사진을 찍는 그녀의 행위는 피해자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가상세계속에서 전지적 시선의 통제자로 살아가는 쾌감에는 고독과 공허함이라는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그 삶의 끝에는 역설적이게도 시선에 노출되었고 범행의 대상이 되었지만 확실한 육체를 가졌던,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가족들을 가진 피해자들에에 대한 동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Red Rooms는 법정 영화인양 자신을 소개하고는 기묘한 인물 탐구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리얼리즘의 형식을 취하는 듯 하더니 대담한 표현주의로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예측불가한 작품이다. 켈리앤이라는 인물은 다가가기 어렵고 파악하기 힘든 수수께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의 존재와 동기가 의문부호로 남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하나의 시대적인 선언보다는 다급한 질문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장난 모니터 화면처럼 녹아내리는 도심의 야경을 담은 마지막 쇼트는 질문보다는 절박한 비명에 가까울 테고.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응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람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가?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 속 켈리앤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은 무엇을 바라며 빛나고 있었는가!
인용
#1 https://screenanarchy.com/2024/09/red-rooms-interview-pascal-plante-talks-craft-music-ethics.html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