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bstance> 노마와 마고에게 선물이 도착했다

이기상 평론가

신체가 기괴하게 변형되고 핏물이 솟구친다. 눈이 있을 곳에 코가, 입이 있을 곳에 귀가 달려있다. 바디 호러 장르에서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서브스턴스>의 바디 호러는 무언가 다르다. 관객석에 있어야 할 우리가 인물의 맥박 속에 갇혀있다. 영화를 본다는 일상적인 행위가 낯설게 변형되고 공포가 솟구친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한물간 스타 요가강사이다. 주변의 관심은 뜸해지고 소속사는 그녀를 내쫓을 궁리만 하고 있다. 거울 속 주름과 세상의 관심은 반비례하는 듯 하다. 어느날 엘리자베스는 ‘더 서브스턴스’라는 비밀스런 회사를 알게되고, ‘더 나은 버전의 나’ 를 만드는 약물을 구매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20대의 몸을 가진 수 (Sue) 가 탄생하고, 엘리자베스는 수의 몸으로 다시 스타 요가강사가 되어 쇼비즈니스에서 고공행진한다. 그러나 ‘더 서브스턴스’의 서비스에는 한가지 유의사항이 있는데, 7일에 한번씩은 육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주일간 수로 살았으면 돌아오는 일주일은 엘리자베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버전의 ‘나’는 약속대로 시간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영화는 계란과 닭이라는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활용하여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계란 노른자에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하는 쇼트, 엘리자베스의 노란색 코트 의상, ‘서브스턴스’ 회사의 노란색 로고 디자인 등,  영화는 양분된 두 인물의 관계를 복제된 노른자라는 메타포로 설명한다. 따라서 자연히 엘리자베스는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라는 해묵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내가 있기에 수가 있는 것인가, 수가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인가?’ 


세상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고, 마침내 그녀는 자기 자신과 혈투를 벌이게 된다. 사회의 뷰티스탠더드가 엘리자베스 내면에 기생충처럼 침투하여 그녀의 정체성을 양분시키는 ‘서브스턴스 (물질)’ 가 되어버린 것이다. 외부의 학대가 결국 인물 속에 내면화되어 폭압적인 자학을 야기시키고, 화려한 화장 뒤의 영혼은 기괴하게 비틀리고 눅눅하게 부패한다. 결국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가꿈은 증오로 가득찬 자학이 되어버리고, ‘더 나은 버전의 나’를 위한 약물은 자살을 위한 독약이 되어버린 현대의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셈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연출은 관객을 엘리자베스의 꿈틀거리는 동맥 한가운데에 밀어넣는다. 초광각 렌즈와 초접사렌즈의 과감한 활용은 마치 혈관의 이완과 수축을 연상시키며 관객의 시공간적 감각을 자유자재로 변주한다. 먹먹하고 폭발적인 표현주의적 사운드 또한 시각적 자극을 증폭시고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디자인 되어있다. 마치 누군가의 창자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꿀렁이는 액체성 음향효과는 바디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관객을 단순한 신체 변형의 목격자에서 그 신체 속에 갇혀버린 체험자로 바꾸어 버린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 엘리자베스의 소원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조건적인 형태로만 주어진다. 이들에게 세상의 사랑이란 지속적인 자기 기만과 자기 착취, 자기 혐오의 대가로만 받을 수 있는 조건부의 보상이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매 순간 아름다운 드레스와 사랑스런 미소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 뒤에 썩어가는 피부와 뽑혀버린 이빨이 절규하고 있을지라도. 



*노마 데스몬드와 마고 채닝은 각각 1950년 개봉한 <선셋대로>와 <이브에 대한 모든 것>의 주인공들이다. 늙어가는 여배우 인물의 전형으로서,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에 낙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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