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less Poetry> 집이 타야 인생 시작

이기상 평론가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가 자전적 성장 영화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만 했던 과정이 있다. 아버지 제이미를 용서하고 그와 영적 화합을 이루는 과정이다. 전편 <현실의 춤>에서 보았던 것처럼 제이미는 무시무시한 폭군이었고, 그런 아버지와 정신분열적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알레한드로는 양분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차갑고 광폭한 남성적 세계와 어머니의 다채롭고 비밀스런 신비적 세계 사이의 서슬퍼런 괴리에서 어린 알레한드로는 몸부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미가 기적적인 체험을 통과하여 영적 성장을 이루어낸 후에야 그의 아들 알레한드로가 힘을 얻고 자신의 성장을 위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던 셈이다. 


<끝없는 시>는 영웅의 통과의례를 단계별로 따라가는 구조라는 점에서 <성스러운 피>, <엘 토포>와 같은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한 내러티브 양상을 띄고 있다. 영화는 청년 알레한드로의 자기 실현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아직 양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던 어린 알레한드로는 가족 나무를 베어버리고 (영웅 신화를 연상시키는 내적 변화의 상징적 행위)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코뮌의 일원이 된다. 그곳에서 알레한드로는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며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 나간다. 


모험을 떠난 영웅 앞에는 다양한 통과 의례들이 등장한다. 먼저 어머니와 똑 닮은 여성 시인이 나타난다 (실제로 어머니 역할과 같은 배우를 기용했다). 스텔라라는 이름의 그녀는 난폭하기 이를데 없는 인물로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 속의 파괴성, 즉 통제하고 집어삼키고 구속하는 여성의 화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복수심에 불타는 질’ (‘Vengeful vagina’) 라고 일컬으며 변덕과 폭력을 일삼고, 길을 걸을때마다 알레한드로의 남근을 손에 쥐고는 끌고다닌다. 이후 알레한드로는 ‘난 더 이상 너가 만든 카오스 속에서 살지 않을거야’ 라는 선언과 함께 그녀와 결별한다. ‘산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를 기다리며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고 있었던 스텔라는 알레한드로의 독립 선포와 함께 처녀성을 상실한다. 두 사건이 시기적으로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텔라가 기다리던 ‘신적 존재’는 어두운 아니마의 시험을 극복한 영웅, 알레한드로 자신인 것이다. 


스텔라 이후 알레한드로의 통과의례는 엔리케라고 하는 동성애자 시인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알레한드로와 엔리케는 <데이지즈>속 말괄량이들을 연상시키는 유쾌한 발걸음으로 도심을 헤집고 다닌다. 둘은 처녀성을 띈 예술가 듀오가 되어 어린아이의 유희적 반항심을 머금은 행위 예술을 함께한다. 그러나 곧 알레한드로는 엔리케의 연인과 바람을 피우고, 모두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을 안고 의기소침한 시절을 보내다가 서커스 단장을 만나 광대가 된다. 자신을 광대의 원형속에 대입하려는 자는 삶의 모든것을 웃음으로 치환하려는 각오가 되어있어야하고, 이는 고통에게서 그 고유의 힘을 빼앗으려는 위대한 인간적인 시도이지만 한 영웅의 잠재력에 분명한 한계를 짓는 행위이기도 하다. 알레한드로는 광대로서 자신의 죄책감과 내적 혼란을 웃음의 재료로 활용해보지만 결국 조소는 영웅의 무기 중 하나일 뿐 그의 정체성이 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알레한드로는 과감히 광대의 철학을 벗어던지고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다시금 확립한다. 


‘다 자란 독수리에게 둥지는 필요없지.’ 방황을 끝내고 시인으로 돌아온 알레한드로는 어린시절 자신의 집이 불타 없어졌음을 알게된다. 보다 뻔한 은유이다. 영웅의 본격적인 성장은 돌아갈 집이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세계가 그의 집이요 정신의 신대륙이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 알레한드로는 자연히 칠레를 떠나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칠레의 정치 난국에 환멸을 느낀 것도 있지만 그의 영혼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알레한드로에게 파리는 단순히 칠레의 파시스트 정치적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참된 자유를 지향하는 상징적인 터전이다. 때문에 파리로 가기 위해 도착한 부두에서 아버지와 궁극의 조우를 하는 장면은 모든 ‘아버지의 것들’과의 화해이며 낯익은 것들과 구속하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고, 그 모든 것 배후의 은유를 발견하는 시詩 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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